솔루스는 루나이(Lunae) 라는 종의 드래곤입니다. 루나이는 깊고 어두운 심해에 무리를 이루어 서식하며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갑니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어두운 심해를 밝히기 위해 스스로 빛을 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솔루스는 돌연변이 루나이로 태어나 스스로 빛을 내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루나이들과 다른 모습을 가진 솔루스는 무리에서 낙오되어 깊고 어두운 심해 속을 100여 년 동안 홀로 외롭게 지내왔습니다. 그런 솔루스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지상의 책들 뿐, 그렇게 솔루스는 책으로 지상세계를 배워갔습니다.
이후 여느때 처럼 물 위로 올라와 지상을 배회하던 솔루스는 타이리우스를 물리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고, 평범한 루나이처럼 빛을 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던 그는 자진해서 지상의 연합군에 지원하게 됩니다.
빈부 격차가 큰 지역에서 부랑아로 태어나 나이나 외형을 속이며 일하거나, 도둑질로 연명하고 도망치며 생존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건 겉모습 뿐이며 진실된 내면은 중요치 않고 드러낼 필요도 없다고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타인에게는 타고난 연기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인기 많고 쾌활한 인물이라는 단편적이고 긍정적인 모습만 보이며 불우한 과거나 어두운 면은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매 순간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마음 놓을 상대 하나 없는 삶에 외로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거짓말을 그만두기엔 이미 유명한 도둑이 되어 있는 상황이라 물러설 곳 없는 생활을 계속하던 중. 사악한 드래곤을 물리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을 듣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하는 소원을 품고 연합군에 지원하게 됩니다. ‘유명 배우 오스카’라는 정말 마지막 거짓말의 탈을 쓰고서요.
어느덧 두 사람이 훈련소에서 지낸지도 4년이 지났습니다. 정규군이 되기 위한 훈련을 거듭하며 전쟁에 대한 불안이 감도는 나날을 보내던 중, 정규군이 타이리우스와의 싸움에서 전멸했다는 소식과 함께 훈련생의 티를 채 벗지 못한 채 최전방인 아르고르로 징집받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오스카는 이대로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아르고르에서 죽을 거라는 체념에 빠집니다. 그런 오스카를 본 솔루스는 지상에서 본 모든 것을 기록해 둔 자신의 소중한 수첩을 내밀며 죽지 말고 돌아와 다시 돌려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이것은 타인을 속이고 자신의 이득만을 취하며 살아온 오스카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루어질 가능성도 희박한, 보증이라고는 손가락 걸기 정도가 전부인 약속에 자신의 소중한 것까지 선뜻 내어주는 일은 오스카의 사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이 일로 솔루스와의 관계를 잠깐의 변덕으로 여기며 가벼운 태도를 유지하던 오스카는 솔루스가 4년간 보여준 조건없는 신뢰와 일관적인 솔직함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게 됩니다. 거짓말로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관계가 처음으로 생긴 것입니다.
대륙 어딘가로 날려간 오스카가 눈을 뜬 곳은 팔론도 산맥, 도적들의 소굴 안이었습니다. 다른 연합군의 동료들도 자신처럼 대륙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라 판단한 그는 자신의 행방을 알리고자 동료들이 자신임을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소문을 퍼뜨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해당 날을 기점으로 도적단을 완전히 와해시킨 오스카는 남은 잔당을 이끌고 몬스터를 소탕하며 그곳에 민간인 피난처를 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산맥을 기점으로 한 가지 소문이 퍼져나갑니다.
'산맥에서 기승을 부리던 도적떼가 소탕되었다. 현재 그 잔당을 한 사람이 이끌고 있다. 여성이니, 남성이니, 노인이니, 젊은이니, 목격담은 모두 달랐지만 그를 가리키는 이름만큼은 단 하나로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솔루스에게 건네받은 수첩은 무사히 품 속에 있었지만 동료들의 소식을 기다리던 하루하루, 오스카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솔루스였다면 지금쯤 이 수첩을 가득 채워나가고 있었겠지.'
오스카에게는 이미 식상해진 상식이나 사소한 일 따위를 빠짐없이 소중하게 기록해나가던 친구를 떠올리며 그와 만나지 못하는 동안 텅텅 비어버리게 될 페이지가 아쉽게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를 대신해서 매일 수첩에 기록을 시작하게 됩니다. 언젠가 약속대로 돌려주게 될 날을 고대하면서요.
솔루스의 6년
한 편 솔루스가 눈을 뜬 곳은 자신이 떠나왔던 심해 속. 가라앉는 솔루스의 눈 앞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가 줄곧 선망해왔던 동족의 빛이었습니다. 그건 결국 가질 수 없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을 빛이었습니다. 그 순간 의지를 상실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대로 심해에 가라앉기를 택했고, 미동조차 없이 긴 수면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3년 후, 잠들어 있던 솔루스를 깨운 것은 그의 정령이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정령이 발하는 미약한 빛을 봅니다. 제 동족들이 내는 빛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한 작은 빛이었지만 지상에서의 모든 순간을 함께했던 빛으로 그 어떤 것보다 찬란했습니다. 이윽고 솔루스는 그 빛을 보며 지상의 동료들과, 오스카와 했던 약속을 떠올립니다. 3년의 수면기 끝에 그들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솔루스는 다시 한 번 지상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의 훈련소는 3년 전 아르고르 전투 이후 사라지고 말았고, 지상에 마땅한 연줄조차 없었던 솔루스는 말그대로 빈털털이 상태로 온 대륙을 돌며 동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동을 위해 잠시간 인간의 용병단을 돕거나, 가게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방랑자 신세를 연명해갑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솔루스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그 덕에 흰 뿔을 가진 선량한 나그네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집니다.
엇갈리는 두 사람
시간이 흘러 1809년. 대륙 곳곳을 돌던 솔루스는 산맥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솔루스는 그것이 자신이 아는 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곧장 산맥 마을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허나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오스카는 산맥을 떠나 직접 동료들을 찾기로 하였고, 솔루스가 도착한 당시에는 이미 오스카가 떠나버린 이후였습니다.
하지만 솔루스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오스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가 살아있음을 확신합니다.
어느 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온 대륙에 울려 퍼지고 그 직후 모두의 입을 타고 한 노랫소리가 세상에 퍼집니다. 노래는 연합군의 첫 승리지인 ‘스카샤 마을’에서 연합군 동료들을 기다리겠다는 내용으로 대륙 각지에 퍼져있던 연합군 모두의 귀에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오스카와 솔루스 역시 그 노랫소리를 듣게 되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곳에서 스카샤 마을로 향합니다.
그렇게 재회하게 된 오스카와 솔루스. 두 사람의 약속이 담긴 수첩이 6년 만에 주인의 손에 되돌아 오게 됩니다.
세월감이 묻어나는 낡은 수첩을 열자 그 안에는 솔루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그것은 오스카가 솔루스와 함께 하지 못한 6년의 세월동안 그간 있었던 일을 빼곡히 적어 둔 편지였습니다.
재회의 기쁨과 동시에 한층 더 가까워진 두 사람은 이후, 타이리우스의 토벌을 위한 정식 계약을 진행하게 됩니다.
정식 계약
이 때에 이미 오스카의 소원은 인생을 바꾸는 것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솔루스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은 기적 같은 것 없이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솔루스는 그동안의 지상 생활과 오스카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는 사람의 마음, 장소 등 빛나는 것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지상 세상을 사랑하게 됨과 동시에 더 이상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소원 (루나이 무리에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두 사람은 심장으로 맺어진 정식 계약을 통해 서로의 감정이 흘러들어오게 되어 솔루스는 오스카의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배우고, 오스카는 솔루스의 '세상의 빛을 선망하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동안의 세월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내면의 성장을 이룬 오스카와 솔루스가 서로의 결핍 된 부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약속의 장미정원으로
정식 계약을 통해 한층 더 강한 능력과 단단한 유대감으로 뭉친 연합군들은 결국 타이리우스 토벌에 성공합니다.
이후 세상은 평화로워지고, 오스카와 솔루스는 정식 계약과 10년 전의 약속을 위해 메디바 숲의 장미밭으로 첫 여행을 떠납니다.
이어지는 여정과 기록되는 이야기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오스카와 계획적이고 이성적인 솔루스. 성격만큼이나 여행 스타일 또한 정 반대인 두 사람의 여행은 한결같이 투닥투닥, 쉬운 여정이지만은 않았지만 닮은 점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에게 배울 점이 많다는 말 또한 되지 않을까요.
솔루스가 때맞춰 데려가 주어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멋진 광경. 오스카가 제멋대로 길을 틀어 발견한 훌륭한 장소.
세상의 반짝이는 모든 곳을 보겠다는 포부 아래 시작된 두 사람의 발자취는 솔루스의 수첩에 차곡차곡 기록되어 갑니다.
하지만 인간과 드래곤, 필멸과 불멸이라는 본질적인 차이는 결국 두 사람 앞에 피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낀 오스카는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자신을 생각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60여 년 전 솔루스에게 받았던 펜던트를 그에게 건넵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오스카를 완전히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솔루스는 그가 건넨 펜던트를 받아들며 약속합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돌려주겠다' 고.
마침내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오스카는 과거의 기억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다시 친구가 되었고, 솔루스는 펜던트를 건네며 약속을 이어갔습니다.
이 만남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습니다. 환생한 오스카는 늘 전생을 기억하지 못 한 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로 인해 솔루스는 때때로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스카는 솔루스와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으므로, 솔루스는 언젠가 그가 자신을 찾아와 줄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400년 뒤. 마침내 기적처럼, 모든 기억을 가진채 드래곤으로 환생한 오스카와 재회한 솔루스.
메디바 숲의 장미밭에서, '루나'와 '테르'로서 다시 만난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가슴 속에 간직해 온 서로의 그리운 호칭을 부릅니다.